아직 깊지 않은 가을에 무슨 세한 타령이랴 싶지만 세한에 어디 계절과 시간의 구분이 있겠는가! 세한(歲寒)이라함은 본디 엄동설한의 긴 겨울을 견디어온 것을 말하는 것 뿐 만 아니라 험난한 세파의 어려움을 당해도 꺽이지 않음을 말함이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이정과 송우초 두 작가의 작품들은 다난했던 한국 동양회화사의 긴 시간을 사생의 전통과 필묵의 전통을 바탕으로 견디어온 인고의 세월이 담겨진 작업들이다. 때문에 개인의 인생사는 차치하고라도 전통을 자기화하고 미혹됨이 없이 지켜나가는 화업의 길 자체가 세한의 역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오늘날 사생의 과정이란 화가에게 있어서 번거롭고 구태의연한 그래서 생략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양화란 대상의 본질을 깍고 덜고 크게 요약하여, 생각을 응축시켜 사물을 그리는 것이다. 그 번거로운 꾸밈을 제거하여 큰 요체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사생이란 단순히 외면의 물상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직접 마주하는 것으로 대상을 요약하고 응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두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인 동양화의 작업과정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사생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각하는 몇 안되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사생을 바탕으로 한 이 두 작가는 각기 다른 필(筆)과 묵(墨)의 세계를 펼치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이정(李靖)은 이전의 세한-연(蓮)작업에 이어 이 땅의 국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잡초처럼 자라는 가로수 플라타너스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대상의 본질을 깍고 덜고 요약하여 마치 물상의 번거로운 상을 저며 내듯이 제거한 한 점의 군더더기 없는 화면이다. 필(筆)이란 비록 법칙에 의거하기는 하지만 운용에 따라 변통하여 질(質)만을 취하지도 않고 형(形)만을 취하지도 않아 마치 나는 듯하고 움직이는 듯한 것이다. 더하여 용필의 예리함은 여백조차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본시 자연에 귀하고 귀하지 않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흔히 부르는 잡초에도 하나 하나의 이름이 있지만 그 존재의 귀함을 모르기 때문에 잡초일 뿐이듯이 플라타너스도 정원수로 상찬되는 나무가 아닐 뿐이지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귀한 것이다. 이정은 잡초같은 플라타너스에게 본디 그 생명의 귀한 존재감을 복원시키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제 세한의 연륜을 미혹됨 없이 드러내는 이정의 플라타너스는 그 흔하디 흔한 존재가 아니라 날을 새운 필선으로 골기(骨氣)팽만한 한 그루의 귀하디 귀한 존재로 변한다. 그간 작가가 해왔던 다양한 매체실험과 삶의 체험들이 세한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으며 이번 작업들은 세한-가로수로 거듭나는 작업이다.
우포작가 송우초(宋宇礎)는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져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우포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왔으며, 화단의 흐름이나 시류에 관계없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주변자연의 아름다움에 천착한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의 이유와 목적을 넘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 있는 아름다움을 고요한 가운데 잔잔한 시정을 따뜻하고 침착한 색조의 묵으로 구사하고 있다. 묵(墨)이란 높고 낮음에 따라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며 물체에 따라 얕기도 하고 깊기도 하여 문체가 자연스러워 마치 붓으로 그리지 않은 듯한 것이다. 그래서 담담하게 대상과 하나가 되어 너와 나의 분별없이 스며드는 묵은 조용히 소리없이 변화하는 시간과 인고의 세월이 담긴 공간으로 변화한다. 송우초의 화면은 인간의 이기적인 논리가 배제된 자연 본래의 고요한 정적의 순간,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어 우리들을 스며들게 한다. 본래가 하나였듯이 자연이 우리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우리가 자연의 품으로 스며드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두 작가는 무비판적인 새로운 미술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보다 전통적인 방식에 밀착하여 자신만의 필법과 묵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를 뛰어 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전통에 밀착되어 있으되 전통을 묵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어법을 구사하는 필묵의 진수가 담겨져 있으며, 역사적인 맥락에서 동양화의 근원을 탐색하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안이하게 조형적 아이디어만으로 개성을 대체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