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의 작품세계 - 칼로 그려진 그림] 이현진은 초벌칠을 한 합판, 패널 위에 형상을 새겼다.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이라기보다 꽃이란 대상을 빌어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과 공간연출을 퍽이나 활달하게 전개시키고 있다는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대담한 표현과 운동감이 강하게 감촉되는 그림이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의 질감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동양화의 종이작업, 화선지나 한지의 표면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런 효과를 만난다.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준 패널 위에서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바탕과 표면의 이중적인 겹침과 드러남에 따른 재미가 그것이다. 작가는 붓을 대신해서 조각도로 화면을 깎고 파 들어가 상처를 만들었다. 틈을 벌여놓은 것이다. 주어진 평면에 지울 수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의 신체의 흔적 그리고 단순한 환영이 아닌 구체적 존재로서의 이미지의 자취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평면과 일체를 이루기보다는 평면에 또 다른 길, 통로, 틈을 만들었다.
먹과 모필, 한지의 특성과 효과를 지운 자리에 다양한 안료와 칼과 손,패널이 대신했다. 그림이면서 동시에 조각이기도하고 평면회화이자 판화나 부조에 가까운 작업이 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돌을 대신해 패널 위에 전각을 한 형국이기도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전각 체험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은 주어진 사각형의 테두리처리에서 잘 엿보인다. 가장자리 끝까지 밀어젖혀서 평면 전체를 화면으로 인식시키기보다는 사각의 테두리를 분명히 인식시키고 그 안쪽 면을 그림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는 구도가 그렇다. 그래서 칼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는 전각에서 엿보이는 칼 맛과 공간구성, 여백의 미 그리고 선들이 자아내는 풍부한 표정을 연상해볼 수 있다.
사실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주어진 사각의 평면에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장치이다. 그림의 존재론적 조건의 하나인 사각형의 평면 안에서 형태와 여백, 선과 면의 절묘한 구성과 연출의 여러 측면에 대한 스터디야말로 그림의 가장 근원적인 일일 것이다.
패널의 피부를 이루는 나무결의 반대방향으로 파나간 칼자국들은 다채로운 선을 만들고 공간을 벌여놓았다. 패널을 화면으로 설정한 것은 선과 면의 분할처리가 쉽고 바닥 면이 드러나도 지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란다. 또한 색감처리문제로 물을 많이 다루어도 관리가 쉬운 이점이 있기에 그렇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업은 칼을 가지고 파낸 전각을 연상시킨다. 작은 사각형의 공간에 형상과 여백의 절묘한 공간구성, 포치의 운영의 묘를 공부하고 있는 과정에서 나온 그림으로 보인다는 생각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여전히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이 그 힘의 소재로 변함 없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와 기법의 실험성에 비해 소재는 무척이나 전통적이라는 생각인데 여기서 꽂는 동양화의 전통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서 작용한다. 동시에 그 꽃은 작가에게 있어 동양적 자연관, 세계관의 탐구와 인식으로서 다가온다. 따라서 여전히 작가 나름으로 동양그림의 전통성을 기법의 현대성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욕망을 만난다. 현재 그녀의 작업은 그런 모색과정의 한 단계로 보인다.
재미있는 효과로 이루어진 이현진의 화면에서 다시 꽃을 본다. 꽃을 빌어 선의 맛과 여백, 공간구성에 관한 관심을 보여준다는 생각, 그러니까 꽃 그 자체는 그렇게 무거운 의미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의 휙, 자취, 공간에 선과 여백이 생기고 연루되어 이루어내는 맛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이다. 화면 전체를 덮어나간 거친 자국들, 문자를 끄적인 유희적인 선들의 맛도 한몫 한다. 흙을 화면으로, 바탕으로 해서 유희하는 즐거움이 배어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구사되고 있는 여러 기법과 전각의 응용이 좀더 치밀하게 구사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화면 바탕과 칼자국, 덮어나간 물감이 맑고 투명한 효과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 즐거운 체험이 독자한 형상화로 결정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노트
순례.........
순례.........
길의 끝에서 마음 안에 성스러움을 담고자 하는 존재.......나는 순례자를 닮고 싶다. 선한 것을 찾으러 떠난 순례자는 자신의 몸을 혹사해 성스러움에 다가가려 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바닥에 무릎을 굽혀 절을 하고 땅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고행과 헌신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누르는 행위, 그 자체이다.
순례자의 길처럼 우리의 삶도 그 끝을 보이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현실 속, 사람들의 모습은 언 듯 보기에 순례자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익숙한 곳에서 손에 익은 일을 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지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또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늘 같은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개미떼의 일원으로 살아가지만 그러한 삶 속에서도 문득 스스로가 가치 있는 한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을 때가 있다. 작품 속에서 인형들은 화사한 색을 입은 인형들과 색이 바랜 인형들과 구분 없이 섞여있다. 혼자 서있기도 하고 모여 웅성거리기도 한다.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가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리기도 한다. 현실 속에서의 삶이 각자 다른 것처럼 인형들도 저마다의 표정과 모습을 통해 자신만이 갖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를 온전히 드러낸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삶의 즐거움이 드러나 있는 표정들이 뒤섞인 인형들은 아직은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마음 속 기대를 안고 순례자의 마음이 되어 길 위에 서있다. 정돈되었던 인형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울긋불긋하게 칠해진 색들이 긁히고 지워지면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공인 것들을 벗어던지고 있다.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행하고 있는 일이며 이러한 행위를 통해 외형적인 무게를 던져내고 본래의 나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인형들은 길 위에서 바삐 움직이기 보다는 마치 멈춰 선 듯,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모습으로 서있다. 이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일이며, 빠른 세상에 비해 느린 마음의 움직임을 기다려주는 일이다.
길 위에서든 우리 삶 안에서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 목적지에 닿기보다는 길이란 공간이 주는 고요와 적막을 즐기며, 공허와 무질서로 어지러웠던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려 본다. 길의 끝에 이르면 누구나 성스러워질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임을 믿으며, 길 위에서 나는 작은 풍경이 된다.
*가보지 않은 길 Journey along the Unknown Path
길 위에 선다...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있는 풍경을 본다. 넓은 하늘과 땅, 상서로운 바람, 낮은 언덕,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간간히 서있는 나무, 풀 그리고 새... 자연은 달이 뜨고 이슬을 맺어 풀이 자라는 생의 이치와 향기 그리고 사랑의 시까지 모두 품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다... 길은 만물의 마음과 깊이, 삶의 활기 그리고 결코 가볍지 않은 공허를 담고 끝없이 이어져 있다. 우주수는 무수한 세월과 기억을 담고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멈춰 서서 긴 시간이 만 들어낸 역사를 내게 이야기한다. 두려움 속에서 시작된 길 위에서 나의 마음은 공허와 무질서로부터 옮겨가 아무 계획도 방향도 없이 길을 따라 흘러 생명공간의 작은 풍경이 된다.
I stand on a road. I see a view which is sunk someone's memory. A wide of the sky and land, propitious wind, a low hill, a standing tree of hovering shape here and there , a plant and bird... Nature includes not only a principle life and fragrancy which moon comes up, but also a poem of love.
I walk along a road ... The way is connected to the mind and depth of all things, the energy of life as well as the heavy emptiness without end. A tree of universe has innumerable time and memory. It talks about the history which has been made and changed from the past, standing at the same place. Eventually, my mind derived by the starting way with fear is moved from emptiness and chaos and flew along the road without any plan or direction, then I become a small landscape of a space of life.
전시평문
[꽃을 위한 비문’전에 부쳐..]
[꽃을 위한 비문’전에 부쳐..]
이현진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된 것은 동문전의 한 모퉁이에서였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그녀의 작품 속의 색감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동양화의 화선지와 먹, 선이 아닌 파스텔조의 감각적인 색조 속에 면이 주가 되는 작품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또한 그녀는 선과 면의 혼열과정에서 깊이감이 상실되는 요소를 해결해 가고 있다.
그녀의 독창성은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한국화라는 범주 안에서 찾아야한다. 이미 장르가 해체되고 모든 매체가 혼용되어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틀 속에서 작품을 분석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의 문인화와 산수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전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화면에서 흘린 서체의 등장이 장르구별의 불가피성을 갖는다.
이현진은 귀국 후 새로운 모색기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화를 그리는 작가의 미국유학에 흔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미국행을 고집했던 이유는 기법적인 문제이거나 표현력을 해결하기 위해서가아닌 새로운 환경 속으로의 저항이며 도전이었다. 그래서 이현진에게는 일반적인 한국작가들에게 있는 강박관념이 없다. 전통 그리고 한국화라는 범주 그래서 받아들여야하는 재료적 한계, 한국적이라고 고집되어지는 사고방식까지... 그 속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그녀의 조형적 노력은 작품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회화의 일반적인 추세인 장르이탈이라는 현상 안에서 작가는 조형표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과감히 한지와 먹에서 탈피, 패널과 지점토를 사용하고 있다. 그녀가 이러한 작업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전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전각이 갖는 선의 이미지, 쭉쭉 뻗어 오르는 느낌과 깊이감 표현에 제한을 가져다주는 방법의 전환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련의 시험과 모색의 시기를 거쳐 한지의 사용을 개량한지로 그리고 지점토와 한지의 혼용시기로 전환하고 있다. 전통한지에서는 깊이감과 두께표현에 제약을 받았으며, 개량한지에서는 제작과정이 번거롭고 장식성이 강해졌다. 또한 지점토와의 혼합에서는 두 성분의 알갱이 차이가 커서 표현력을 저하시켰다. 상감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지점토의 사용은 지지대의 사용에서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했다. 전통적인 창살화판을 사용했을 경우 지점토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사용이 불가능하였다. 그녀는 현재 패널을 사용하고 있다. 패널은 선과 면의 분할처리와 바닥면이 드러나도 자연스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사용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변형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작가는 인식하고 있어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작가는 위와 같은 방법론을 가지고 무엇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이현진은 작품제작과정을 자신의 인격수양의 근간으로 삼고자한다. 작가의 이 말은 혈기왕성한 작가에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찾고 있으며 작가는 자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현진은 자연의 변화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가고 또한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인격적 성숙을 체험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의인화하고 있다.‘꽃을 위한 비문’에서 그녀는 화면 귀퉁이에 자신을 담고있으며 작품 속의 꽃은 힘없는 것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며 소산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속의 자신이다. 쉘린은 자연은 의식적인 행동이 결여되고 있고, 따라서 자연미는 단지 우연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자연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작가는 자연을 의식화시키고 있다. 그녀가 꽃을 통하여 얻고자하는 것은 대자연의 섭리 속에 순응하는 대표격인 꽃을 위해 세워주고자하는 비문은 삶에 대한 욕망이거나 집착에서의 초월을 의미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다시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꽃, 그 꽃에게 의식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비문을 세워주고 있다. 보잘 것 없는 미물과 같이 스스로 현실에 만족하고자...
이현진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 사회로부터 유일한 피난처로,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고뇌에서 벗어나 은거할 수 있는 세계를 그녀는 자연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