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전시
수경 개인전 (“가수 앵앵이 양의 삶과 죽음” / 스페이스 빔, 인천, 2004)
글 같지 않은 글, 쓸 때 마다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처럼 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딴청을 피우는 시간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와 나와의 접속 지점이 상당 부분 어긋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보통의 전시 ‘서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작품에서 발견되는 이런 저런 특성들을 미학적, 철학적 틀에 그럴듯하게 연결시켜야만이 ‘뽀다구’가 나는 법이라 필자 또한 수경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총체적,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소개할 수 있을까에 오로지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녀의 행적(?)을 파헤칠수록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점점 비좁아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 할 말 다 하고 그네들끼리 재밌게, 때로는 진지하고도 날카롭게 서로의 반응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나름대로의 생성적인 연계를 도모해나가고 있는데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면 나도 수경이라는 작가의 지인이 되어 한 마디 거드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설픈 방식으로 무게를 잡고 나섰다가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드는 것보단 백배 낫겠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들었던 인쇄물의 글도 죄다 주변 사람들이 맡아왔더군. 어쨌든 한 부담 덜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수경이 ‘친구’, 혹은 그녀의 작업을 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결과 갖게 되는 생각은 특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각종의 사회적, 미학적 관행과 습속에 길들여진 고루하고 답답한 측면들에 많은 관심을 할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홈페이지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글귀 중 “근데... 내가.... 수동적인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정말 짱나... 때로는 수동적일 때가 있는데 말야. 어쨌든 난 내 자신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수동적인 걸 보면 참을 수가 없다.”는 표현은 이러한 측면을 직접적으로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입장이 반항아적인 무작정의 일탈과 자신만의 주관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를 무시하거나 비껴가지 않으면서도,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잘한 사연과 사건들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를 메뉴로 그녀 나름의 또 다른 소통 구조와 방식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러한 면에서 그녀의 작업은 다분히 메타적이다. 그녀가 ‘미술’에 있어서 전통적인 재료나 형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는 폭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그녀는 이렇게 확보한 회화나 드로잉, 사진 등의 형식을 인터넷 홈페이지이나 책자, 스티커 이외에 설치, 퍼포먼스 등 상황과 맥락에 따른 타자와의 접속 형태를 거기에 걸맞는 방식으로 만들어 가는데, 그것은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결말이 아닌 다양한 참여를 가능케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순간순간의 체험과 생각들을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행하여 생생하게 기록해나가는 만화적 형식은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를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상상력과 반응을 유발시키면서 ‘실질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쯤 되면 거의 예술이 일상화된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러한 수경이 이번 전시에서는 “가수 앵앵양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 시대의 비극(?)을 보여준단다. ‘앵앵’이라는 다소 신파조의 명칭은 작가 수경이 “가장 조악하고 천박한 말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말”이라고 하는데, 다분히 맹목적인 사고의 소유자를 연상시키면서도 그 이면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삶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유별나게 벌~건 곱슬머리에 빨강 립스틱, 반짝이는 황금색 원피스(아마도 이러한 차림새는 일반인들에게 가수의 전형적인 기표로 남아있다)를 걸치고 노래하는 앵앵양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앵앵양이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의 욕망의 구조와 그 좌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물론 작가는 자신과 동일시한 여인이라고 하지만).
앵앵양은 한 가정의 귀여운 딸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바램대로 착실히 공부하여 S대 법대를 들어갔지만 어릴 적부터의 꿈인 가수가 되기 위해 본격적인 ‘몸 만들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오디션에서 타고 난 음치임을 확인한 그녀는 그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데 대한 실망과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우나 ‘현실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고시를 준비 중인 같은 과 친구에게 관객을 돈으로 사면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행사를 어렵사리 치른다. 그러나 이미 약속한 관객에 대한 지급비와 공연장 임대료를 충당하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로또 복권에 희망을 건다.
작가 수경이 만든 가상의 픽션(fiction)으로 한 개인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현실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위에서도 이야기한 우리 사회가 지닌 욕망의 다양한 배치와 그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행사하는 것 같지만 그 누구도 타자의 시선에서 비껴나지 못하며 사회적 욕망,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이러한 욕망의 배치에서 탈주를 감행할 수 있을까?
수경이 준비한 “우리도 앵앵이가 되자”라는 ‘아바타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바타(Avata)’는 가상의 공간 속에 만드는 또 하나의 분신으로 탈 주체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기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지인들로 하여금 ‘또 다른 나’가 아닌, 나의 한 부분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동일성의 기표인 앵앵이 ‘치장’을 하게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지점에서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나’가 아닌 나에 대한 새로운 ‘눈뜸’이다.
필자는 수경의 작업을 대하면서 그녀가 지닌 문제의식의 진정성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모습에 많은 공감과 기대를 갖는다. 관심의 대상을 나를 배제한 외부가 아닌, 나 안의 외부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안팎의 경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흩뜨리는 작업은 여전히 초월적, 관념적 미학을 앞세워 신비와 권위만을 내세우고 있는 면이 없지 않은 우리의 미술 상황에서 건강하게 제반 삶의 영역과 맥락 속에 뿌리를 내리는데 한몫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직 요소요소에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하는 학습된 과거의 유산들이 그녀가 나아가고자 하는 보다 경쾌하고 재기발랄한 측면들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는 태도는 그녀의 지향점이 ‘저 곳’이 아닌 여전히 ‘이 곳’임을 확인케 해주며, 섣부른 행보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우려를 씻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수경이 친구가 지닌 가장 큰 매력과 유혹의 무기는 작업실을 방문하면 직접 만들어준다는 떡볶이 요리가 아닐까?^^ / 스페이스 빔 디렉터 민운기
전시개요
갤러리 도스는 2006년 하반기에 공모 작가 3인을 선정해 3회에 걸친 전...
갤러리 도스는 2006년 하반기에 공모 작가 3인을 선정해 3회에 걸친 전시를 선보인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매체나 주제에 대한 제한 없이 공모된 작품들 중 세 명의 작가를 선정하였으며 수경의 전시는 그 중 세 번째 공모 전시로,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진 캐릭터를 통해 사람과 물고기가 맺어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어 (人+魚 / Human+fish)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사람과 물고기가 만나 친구가 되지만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욕망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의 비극적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영상과 회화작업을 통해 풀어낸다.
사람과 물고기가 캐릭터화 되어 등장하는 수경의 그림은 무겁지 않다. 그러나 한지 위에 수간채색 기법으로 수 차례에 걸쳐 섬세하게 덧칠 하는 과정을 거친 만큼 시각적으로도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더더욱 진중하다. 수경은 무수한 연결 고리들이 얽혀진 사회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관계와 계급의 문제를 꼬집는다. 적정선을 모르고 치닫는 이기적인 욕망들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부조화, 갈등, 그리고 그 끝에 오는 비극적 결말을 사람과 물고기 캐릭터가 주체가 된 이야기 구조를 통해 풀어낸다. 물속에서 수영하기를 좋아하는 한 인간이 어느 날 어항 속 물고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을 물고기와 동일시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없이 이루어지는 관계는 끝없는 기대와 소유욕, 강압과 같은 이기적 본성들을 겉으로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불행한 결론에 이른다. 물고기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인간은 물고기를 품고 물 밖으로 나오지만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사람과 물고기, 서로 다른 이 두 존재는 결코 서로에게 길들여지거나 적응될 수 없는 생물학적 차이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물이라는 환경은 이들에게 있어 생명의 샘이 되는 동시에 생명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회화와 영상의 화법(話法)을 이용해 마치 관계 맺기에 서툴렀던 지난시절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듯 혹은, 관계 속에서 절망한 누군가를 담담하게 위로하듯 사람과 물고기가 만나 친구가 되고 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관계 지워진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은 결국 스스로와 상대 모두에게 '아픈 짓'이 될 것이라고 충고하듯 말한다.
작가노트
인어란 상반신은 사람의 몸, 하반신은 물고기의 몸을 하였다는 전설의...
인어란 상반신은 사람의 몸, 하반신은 물고기의 몸을 하였다는 전설의 생물이지만 여기서는 人+魚 즉 인간과 물고기의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탈바꿈 하였다.
인간과 물고기의 관계는 다른 종족의 관계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둘의 관계는 동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죽게 되고, 사람은 물속에 오래있으면 죽게 된다. 이렇게 다르고도 불평등한 관계를 그린 내용이다.
작품의 내러티브는 이러하다.
심심한 인간이 물고기를 발견하게 되고, 물 속의 세계를 동경하여 물고기와 친구가 된다.
물 속에서 함께 놀게 된 사람과 물고기, 하지만 물고기가 물 바깥의 세계로 나오게 되자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고, 사람은 그저 물고기를 떠날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없애버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영상과 회화작품으로 보여준다.
영상작업으로는 작업의 이야기 구조 전반에 대해 감상할 수 있으며, 세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회화로 감상하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상황설명이다.
이분화된 상황, 그리고 비극적인 상황을 풍자적인 이야기로 표현하며, 등장인물의 형태는 희화화 시킨다.
또 이러한 냉소적인 이야기를 예쁜색으로 칠해주고 디테일하게 그려낸 것은 문학으로 따지면 반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강한 자는 “사람”으로 비유되고, 약한 자는 “물고기”로 비유되는데, 강한 자는 베푸는 자가 될 수도, 파괴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동경이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존재지만, 결코 이들 둘은 같은 힘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는 계급사회나 국가와 국가관의 관계와 같이 아주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언제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갖으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강한 자는 다른 존재에 대해 동경하기에만 그치지 않고 소유하고자 하고자 하며,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지만 그 가치가 떨어지면 더 이상 친구로 남겨두지 않는다.
관계라는 것은 둘 이상의 사람이나 집단이 만나 인연을 맺는 것이지만 이들이 항상 같은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어디서나 존재하며 그것은 곧 물고기와 인간의 관계로도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