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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3.05.03.토~2003.05.31.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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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글 |
너그러움과 넉넉함의 미학 - 오채현 조각전 "탄생과 인연"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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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과 넉넉함의 미학 - 오채현 조각전 "탄생과 인연"에 부쳐
직선이나 예각을 발견할 수 없는 부드럽고 풍만한 양감을 지닌 4등신의 짤막한 신체, 묘사보다 표현을 중요시함으로써 나타나는 상징성, 고졸미소(Archaic Smile)를 띤 표정, 정면성의 강조, 거친 질감 등 오채현의 작품은 민화나 벅수와 같은 민속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강한 생명력과 함께 수수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 시대에 정립된 비례의 기준과 원리에 충실한 조각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작품은 세련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 즉 원시미술의 야만성과 지역주의의 소박성에 대해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사의 근원이 경주 남산에 산재해 있는 불상, 토우나 장승과 같은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에 대해 '소박함의 아름다움'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술의 결여 혹은 표현대상에 대한 묘사력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예술관, 그리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스런 미의식의 결과임을 인정할 때 그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오채현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작가자신의 기질은 물론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에 대해 먼저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그가 요즘 찾기 힘든 장인근성을 지닌 조각가라는 사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장인근성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용어이다. 노동의 질이나 양보다 아이디어를 더 중요시하는 현대미술에서 우직한 성실성이 곧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더욱이 전통적인 장르로서 조각의 개념이 해체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노동에의 헌신이 자칫 무모한 과거지향적 노력이나 퇴행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은 무생물의 물질에 생명성을 부여함으로써 형상을 활성화시키는 요소임과 아울러 시각적 의미를 고양시키는 주요한 요소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인이란 단순한 기술자로서 재료인 물질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질을 경험을 통해 체득한 가운데 재질의 특성을 거슬리지 않고 물질 속에서 감춰진 생명의 형상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기 위해 사용한 말이며 따라서 장인근성이란 그 목표를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는 태도나 자세를 지탱하기 위해 쓴 용어이다. 거기에는 미숙한 기술이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교의 남용 역시 용납되지 않는다. 속에 갇혀있는 형상을 꺼내달라고 요청하는 듯한 돌덩어리를 작업실로 옮겨놓고 흐뭇해하며 언젠가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는 형상과 일치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작가를 보노라면 그는 영락없이 우리가 상실해버린 한 사람의 장인인 것이다.
두 번째, 그의 작품은 모두 인간적 규모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재료인 돌의 선택으로부터 작업의 모든 공정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작업한다. 이러한 작업의 특성 때문에 크기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가 선택한 재료들이 대부분 거대한 바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랜 세월에 걸쳐 닳고 마모된 둥글고 넓적한 돌이 많은 탓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한눈에 작품의 전체를 간파할 수 있는 인간적 규모를 지닌 까닭에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작품의 규격이 작은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모두 자기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두고자 한다. 이러한 완결성은 당연히 작가의 탁월한 기량의 산물이다. 그가 이태리에서 유학하면서 제작했거나 혹은 귀국하면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자연에서 채취한 화강석을 재료로 작업하고 있다. 낭만적으로 표현하자면 대지의 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돌덩어리들은 채석장에서 구할 수 있는 돌보다 단단하고 조각하기에 힘든 형태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놓은 그 형태 속에서 어떤 형상을 추출하기 위해 재료를 학대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재료와 동화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재료가 스스로 형상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자 재료와 함께 호흡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과도한 가공을 절제한 결과 가공되기 직전의 덩어리가 지녔던 형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소박한 단순성도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감소되는 체적만큼 재료의 순결성 또한 감소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솜씨를 뽐내기보다 그것이 재료와 조응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술의 과잉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의 작품이 해학의 너그러움을 통해 생명의 존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컨대 히죽 웃고 있는 호랑이는 다소 우둔하게 보일 정도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며 가축 이상으로 친근하게 보이는데 그것을 통해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풍요로운 해학정신을 읽을 수 있다. 지금은 동물원 우리 속에 갇혀있는 상태로만 만날 수 있는 호랑이는 전통적으로 지킴이 역할을 수행해온 동물이자 우리의 신화나 설화, 민담 속에서 성급함(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는 쑥을 먹고 견뎌내야 하는 인내의 시간을 참지 못해 달아났다), 우둔함(영리한 까치와 멍청한 호랑이를 다룬 민화나 곶감이란 말만 듣고도 줄행랑을 친 호랑이) 등 인간의 성격을 풍자하기 위한 비유뿐만 아니라 의리, 효행 등 교육적 목적을 띤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호랑이는 합리주의와 기능주의가 윤리가 된 우리 시대의 규범 너머에 있는 설화적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종의 매개자라고 보다도 무방할 것이다. 비단 호랑이뿐만 아니라 아기를 점지해주는 삼신할미, 기자, 장군 등 그가 '탄생'이란 주제 아래 제작한 일련의 대상들은 안녕과 풍요를 염원했던 전통 무속신앙과 관련 된 대상으로서 돌부처만큼이나 우리의 삶, 그 무의식의 심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신앙의 대상이다. 생명숭배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러한 대상은 비단 신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삶을 윤택하고 여유 있게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가공할 위력을 지닌 채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나 삶의 과정에 순응하려는 넉넉함을 표상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 하나의 거울단계를 보여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채현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은 불교적 세계관에의 자기동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불상들은 운주사 여기저기 놓여진 석불의 그 수더분한 용모와 자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아가 경주 남산의 골짜기마다 부처님을 새겨놓은 장인들의 신앙심을 되살리고자 한 애틋하고 각별한 태도도 발견할 수 있다. 상호(相號)와 수인(手印)을 통해 석가모니, 약사불, 미륵불, 관음보살 등 구체적인 존상명(尊像名)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도 있지만 그가 조성한 불상들은 특정한 불상을 지시한다기보다 넓게 부처님 전체를 함축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의 상호는 천진무구한 어린이의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어떤 작품은 남산의 장창골에서 발굴되어 경주박물관에 옮겨놓은 이른바 삼화령 삼존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큰 바위 덩어리에 조각한 본존상과 관음보살은 부조이면서도 마치 이 불상들이 돌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듯한 생생한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작은 크기로 제작한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함과는 다른 단아한 기품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통일신라시대의 성숙한 문화가 만들어낸 불상이 현대에 부활한 듯하다. 섬세하면서 견고하고, 엄숙하면서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두 불상은 안정된 비례, 풍부한 볼륨, 우아한 선이 만들어내는 미적 특질을 드러내고 있어서 화강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소박한 단순성이 형식에 집착한 결과는 아니란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균제와 조화란 고전적 품격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빈켈만(H. Winckelmann)이 <라오콘>에 대해 규정했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우대'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불상의 경우 경배와 신앙의 대상으로서 종교적 의미와 중요성이 예술성을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의(dogma)에 집착하거나 과거에 만들어진 것을 단순 복제하거나 기계적으로 모방할 경우 현대의 종교예술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양자의 경계가 예리하게 분리될 수 없는 까닭에 종교미술이 그만큼 작가에게는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는 전통의 복원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기양식을 찾아가려는 진지함을 잃지 않음으로써 종교와 예술이란 두 세계를 조화롭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업세계는 소재로서의 전통이 아니라 자기양식의 정립을 위한 모색으로서 전통에 대한 재해석의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대불교미술의 길을 찾는 일종의 구도(求道)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와의 대결이 아니라 그것과의 화해를 이끌어 가는 여유와 관용의 미덕이 만들어내는 공간, 곧 마음의 영역이 돌을 매개로 구현되는 과정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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