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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흔(墨痕)에 비친 단맛
2001년인 것 같다. 그때 오늘 작가 배정호와 함께 동래 민속식당 2층에서 같이 작업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더 좋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지만 그때만큼 재미있게 작업하지는 않는 것 같다. 몇 일전 배정호 작업장 아니 집에 차 한잔 마시려 잠시 들렸다. 그는 양산 작업장이 여의치 않은지 아파트의 작은 자기방에서 화판 하나로 화선지에 얼룩을 만들고 있는 모습에 몇 년전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최북이 성벽에서 눈에 쌓여 생애를 마치듯 예술가는 춥고 배가 고픈가? 찹찹한 냉방에 군용 모포 하나를 바닥에 깔아놓고 먹과 아교로 얼룩을 만드는 모습이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과 너무 흡사(?)하니.
동래에서 같이 작업장을 쓰던 그때도 화선지에 화장지를 덮고는 열심히 얼룩을 만들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먹 번짐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기는 자연의 소리라고 하면서. 작은 자기방 옆에 수북이 쌓아둔 화선지의 얼룩은 그간 배정호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 중 몇 장을 뒤적이며 물었다. “전부 담묵이네? 그때는 농묵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내가 배정호 그림의 변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술친구니까. “아예. 담묵이 좋잖아요.” 이 말 한마디가 배정호의 작품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아 주었다. 그래 담묵이 좋다. 이경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에 보이는 담묵은 조영석의 <승려탁족도(僧侶濯足圖)>의 농묵에 비해 단맛을 준다. 오행의 중앙에 있는 이 단맛이 나는 담묵의 맛이라고 본다. 중앙에 있기에 이 맛은 모든 맛을 간직하고 또 배척한다고 할 수 있다. 배정호의 담묵이 주는 담아(淡雅)한 맛은 서로의 내용은 달라도 이경윤의 <고사탁족도>와 같이 단맛을 느끼게 한다. 배정호는 이 맛을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몇 년전 화선지에 우려내고 있는 것도 담묵에서 농묵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찾았고, 이를 통해 자연을 해석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의 작품 역시 그 연속성으로 보이니까. 그러나 그때는 그 단맛을 잡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면, 이제는 잡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 그 맛은 내가 보는 인상이라 하자.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그림의 소재적 특징은 담묵으로 처리된 얼룩, 꽃 또는 나무뿐이다. 담묵의 얼룩을 통한 흔적과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꽃 모형을 그린 그 이유는 뭘까? 도상학으로 볼 수는 없지만 얼룩은 역사, 꽃은 시간, 담묵은 맛, 분위기로 봐도 될까? 내가 보기에는 그의 그림은 ‘얼룩 또는 소이연(所以然), 추상 + 형상(꽃, 나무) 또는 소당연(所當然), 사실’ 의 접목으로 보인다. 즉 그는 의도하지 않은 형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 많은 얼룩이라는 흔적으로 포장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묵흔을 통한 작은 대상의 부각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작은 대상이 배정호에게는 유일한 동적인 존재다. 그러나 이 대상은 순간의 유동관계를 가지진 않는다. 이는 사계절의 변화와 함께 움직이는 자연의 변화를 상기하여 접목하는 동시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는 담묵과 함께 배정호가 그림을 통해 말하는 제시어가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얼룩은 화선지와 먹의 작용으로 습염되는, 즉 퍼져가는 과정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크기와 반발작용이 일어나면 그 이상 번지지 않게 드라이기로 말려 고착시켜 버린다. 그래서 우연으로 생기는 효과나 기법으로 보기보다는 작가의 의도하에 만들어진 먹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얼룩은 우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이 얼룩을 역사의 흔적으로 본다. 그만이 보는 자연의 풍경을 얼룩이라는 역사(자신이 해석하는 역사)에 자신의 기록을 첨가하고 있다.
나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하늘에 떠 있는 저 달이 언제 나에게 아름답게 보인 적이 있는지. 술잔 속에 담긴 그 달은 태백이 만든 생산물이 되었듯, 저 달은 옛 선인들의 마음을 동요케 했다. 하지만 달은 어릴 적 나의 밤길 안내자 역할을 했을 뿐 감동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역시 나에겐 가로등보다도 못하다. 그렇다고 나는 그 달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달이 주는 심미적 작용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단지 달의 존재를 잊고 지냈을 뿐이다. 배정호는 그 망각을 들추어내려는 작업을 하려하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 수묵의 맥을 이어가면서 가로등을 달을 쳐다보는 자신의 모습을 화선지에 얼룩으로 꽃으로 나무로 담아내려 한다. 그것도 담묵으로. 아무튼 특정한 사물과 닮음, 혹은 닮지 않음 사이에 존재하는 배정호의 단맛이 나는 담묵화는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얼룩에 이렇게 많은 비중을 두어해야만 하는지, 꼭 담묵을 통한 화면구성과 담묵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나만 일까.
만약 나에게 배정호의 그림이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그림에서 단맛을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배정호 그림에 나타난 담묵의 담아한 이 맛처럼 그 역시 담아한 맛을 주는 사람인가? 라고 믿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이번 전시회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닌지, 긴지ㆍㆍㆍ.
구본호 (동명대학교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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